‘오징어 게임’, 한국을 선진국 궤도에 안착시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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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징어 게임’, 한국을 선진국 궤도에 안착시키다
  • 김승수
  • 승인 2021.10.07 08: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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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근원 시니어 칼럼니스트
심층심리분석가
프랑스 스트라스부르그 제1대학 영상학 박사
e-mail : youngmirae@naver.com

 

정근원 박사
정근원 박사

2,3년 전부터 외국에서 한국이 선진국이라고 할 때 어안이 벙벙했었다. 영국 프리미어리그에 쓴 10월 5일 댓글을 보면 외국에서 한국에 대한 감탄이 더 큰 것 같다. “한국은 정말 이상한 나라다. 저 작은 나라에서 뭐가 이리도 많이 쏟아지고 있는걸까. 손흥민, 황희찬, 오징어게임, BTS. 한국이라는 태풍이 전세계를 누비며 초토화시키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기분 좋은 태풍이다.” 정작 한국인인 우리가 한국의 위상이 근래에 얼마나 달라졌는지 모르는 것 같다.

넷플릭스가 계약을 맺은 83개국 모두 두 주만에 ‘오징어 게임’이 1위를 했다. 할리우드의 무덤인 인도에서조차 1위를 한 것은 할리우드를 기분 나쁘게 만들었을 정도다. 앞으로도 ‘오징어 게임’ 열풍은 지속될거라고 한다. 넷플릭스가 송출되지 않는 중국에서도 20억이 넘는 조회수를 기록하며, 90여개국에서 1위를 찍고 있다. ‘오징어 게임’이 한국호란 인공위성을 선진국 궤도에 안착 시켜버렸다. 어떤 이유로 이런 열풍이 부는걸까?

어떤 장르도 한국에 들어오면 인간 냄새가 나버린다

할리우드의 도둑 11명의 이야기인 ’오션스 일레븐’은 고도의 예술 같은 도둑질이란 기술에 초점이 맞춰져있다. 이와 유사한 최동훈 감독이 만든 ‘도둑들’은 도둑들의 인간 이야기로 가슴이 먹먹해진다. ‘오징어 게임’도 게임에서 탈락하면 죽는 Death Game이란 장르에 속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동혁 감독 손에서 죽음보다 등장인물들의 삶의 이야기로 깊은 생각을 하게 만들고, 감동을 준다. 이 영화는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죽음은 스토리에 역동성을 부여하는 장치가 되고, 등장인물과 그들 사이의 관계에 관객들을 몰입시키며 배경이 되어간다.

한국에서는 이야기가 치밀하게 구성 되어도 인간적인 면이 들어간다. ‘오징어 게임’에서 깐부와 깍두기도 여기에 해당한다. 깐부는 오일남 할아버지와 기현이 한 팀이 되었을 때 구슬을 공유하는 ‘깐부’를 맺으며 연대와 공유하는 관계로 들어간다. 깍두기는 놀이를 하면서 나이 어린 동생이나 약한 친구를 소외시키지 않으면서 이들을 놀이에 참여시키기 위해 만든 장치다. 술래에게 잡혀도 살려주거나 규칙을 상황에 맞게 변형시켜 서로를 챙겨주며 배려하는 규칙이다. 서구에서는 이런 규칙을 설명할 수 있는 단어가 없다고 한다.

우리에게는 당연한 깐부와 깍두기가 세계인들에게는 놀라운 발견이다. 이성(理性)에 기반을 둔 서구철학은 ‘이다, 아니다’라는 이분법에 익숙하다. 한국의 전통놀이는 고려할 수 밖에 없는 인간적인 면들을 아우를 수 있는 규칙을 깐부나 깍두기 같은 시스템으로 해결해왔다. 외국인이 한국에 와서 놀라는 것 중에 식당에서 반찬이 떨어지면 돈을 받지 않고 무제한 제공하는 것이다. 자본주의적 사고에 맞지 않는 계산법이다. 달리 말하면 기계적인 사고의 이분법을 넘어서 심정적인 것들이 주고받아지는 문화다. 합리적이고 기능적이며 효용성을 따지는 자본주의에서 느낄 수 없는 정서가 세계에 ‘오징어 게임’ 열풍을 일으킨 원인이 아닐까?

이분법을 넘어서게 만드는 정서는 어디에서 나올까?

필자는 마음을 읽는 섬세한 관찰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외국인들은 한국 사람들이 모이면 공기를 읽는 것 같다는 표현을 한다. 쭈빗거리고, 소외되고, 무안을 타고, 점잖은체 하지만 속으로는 당황한 그런 미세한 마음을 포착하는 민감함이 한국인에게 있다는 뜻일 것이다. 달리 말하면 마음의 결을 느끼는 직감력이 뛰어나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마음은 ‘나’에게서 벗어나 상대방의 내밀한 마음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이런 마음가짐은 상대에 대해 연민을 일으키는 내적 요소다.

깍두기는 소외될 사람에 대한 연민을 해결하기 위해 나온 놀이 규칙이다. 연민과 동정을 중요하게 여긴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연민을 감정이나 사랑이 아닌 고통을 함께 하는 데 있다고 했다. 깍두기는 고통을 함께 하는 것을 넘어서서 적극적으로 즐거운 놀이로 승화시킨다. ‘오징어 게임’을 본 외국 사람들에게 뒷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은 묵직한 감동을 준 부분이 바로 이 깍두기였을 거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이런 감정 떨리는 공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집단지성처럼 집단정서를 만들어낸다.

우리가 코로나19에 대한 대처를 잘한 것도 나 자신보다 내가 타인에게 코로나를 전파하지 않으려는 집단정서가 작용해서 마스크를 잘 쓰고 정부 지시를 잘 따라준데서 나온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이런 한국인의 집단적인 정서가 죽음 게임인 ‘오징어 게임’도 죽고 죽이는 방법이 아니라, 죽음 앞에 마주 선 사람들이 서로 마음을 쓰고 배려하는데 중점을 두며 영화를 만들게 했다고 생각한다. 한국인의 DNA에서 나왔다는 뜻이다. 정서를 건너뛰어 옳고 그름을 가리는 이성으로 가버린 서양에서는 못느끼는 정서를 죽음의 게임에서 느끼는 아이러니로 외국인들은 당황했을 수 있다. 마음을 쓰는 것은 공유하는 의미로 공감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놀이에 의미를 부여하는 ‘오징어 게임’은 신파인가 살아있는 정서 표출인가?

가장 치열한 심리전을 보여주는 놀이는 10개의 공기돌 놀이일 것이다. 서로 친한 사람 둘이 팀을 이룬 이 놀이는 알고보니 상대를 죽여야 내가 살 수 있는 놀이다. 이 장면은 인간의 내면을 추악하게 또 아름답게 표현한다. 새벽이와 지영은 처음으로 통성명을 하고 상대의 이야기를 듣는다. 살아야 할 목적이 있는 새벽을 위해 지영은 스스로 게임에 진다. 기훈과 오일남 할아버지도 기훈이 자기를 속인 것을 알면서도 기훈이 보여준 관심에 고마워하면서 죽음을 자초한다. 이런 설정을 하며 인류애란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한국의 드라마와 영화에는 흔한 편이다. 관객들은 신파라며 한국 영화가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고 있다.

정작 외국인들이 한국 영화와 드라마에 매료되는 가장 큰 이유로 이런 신파에서 느끼는 감동이라고 한다. 드라마의 결말도 기훈이 상금 456억원을 포기하는 행동을 보여준다. 상우는 이런 기훈을 위해 스스로 자살을 택하면서 기훈이 상금을 받게 만든다.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 이 영화는 건조한 게임의 규칙이 아니라 게임을 하는 각자의 이유와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에 초점을 맞춘다. 죽음 게임이 단순히 기계적인 성공과 실패라는 건조함을 넘어서 인간의 내면에 연결시키기 위해서다. 이렇게 의미를 부여하는 한국인의 정서에는 기계나 동물이 아닌 인간이고자 하는 강한 열망이 담겨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세계인들이 ‘오징어 게임’에 열광하는 이유는 인간이기를 포기하지 않는 신파에서 미래의 희망을 찾기 때문이 아닐까?

돈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천민 자본주의를 기현은 엄청난 돈 앞에서 포기한다. 통장 속의 돈도 쓰지 않으면서 계속 고민하며 밑바닥 삶을 살아간다. 그가 오일남 할아버지를 만나서 ‘오징어 게임’에 도전하라는 제안을 받아들일 뉘앙스를 풍기며 영화는 끝을 맺는다. 속편에서 전세계는 그가 고민한 내용을 어떻게 풀어낼지 마음 조리며 기다릴 것이다. 한마디로 요약을 하면 천민 자본주의는 극복할 수 있는 것인지 묻는 마음이 도사리고 있다는 뜻이다.

이런 물음을 아주 쉽게 하고 있는 ‘오징어 게임’

영화에 등장하는 게임들은 시니어들이라면 어릴 때 많이 하고 자란 놀이들 이다. 게임 규칙도 30초 안에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쉽다. 게임 관련 서구 영화들은 천재적인 머리 싸움을 하는 엘리티즘을 바탕으로 하는 영화들이 주류를 이룬다. ‘오징어 게임’은 이런 면에서 누구나 할 수 있는 서민적인 민주주의가 느껴진다. 이렇게 쉬워서인지 이 영화에 등장하는 다양한 놀이를 즐기는 사회적인 현상이 세계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K-놀이가 광풍을 부는 것 같다.

민주주의를 구태여 끌어오면, 죽음을 담보로 하지만 놀이는 철저하게 공정하다. 게임을 시작하기 전에 게임을 포기할 자유도 있고, 게임 중에도 포기할 수 있다. 이 영화에서 게임을 만든 사람은 사회의 공정에 대한 한(恨)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뿐만이 아니라 깍두기도 포함시켜 억울한 사람이 없게 용의주도 하다.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영화지만, ‘오징어 게임’이 던지는 사회적 질문은 그래서 묵직하다. 영화는 각자의 관심에 따라 볼 수 있는 여지를 열어놓고 있다. 재미만을 위해 볼 수도 있다. 인간의 욕심과 폭력이나, 자본주의나, 황금 만능주의나, 인간성의 밑바닥에 대해서 등 철학적 질문을 던지며 볼 수도 있는 오픈된 영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미 위주의 영화가 아니라는 느낌 때문에 저절로 질문을 하게 만든다. 이 질문이 한국에 숙제를 던진다.

한국은 숙제를 해낼만한 역량이 있나?

필자는 몇 년 전부터 한국의 도약에 놀라서 한국에 대해 다양한 분야를 조사해왔다. ‘오징어 게임’이 단시간에 세계적인 열풍을 만들면서 한국을 선진국 궤도에 안착시킨다는 제목은 그래서 붙인 것이다. 찾아서 보지 않으면 신문이나 방송에 한국의 발전이 잘 소개가 안되어서 정작 한국 사람들이 한국의 위상이 어떤지 잘 모르고 있다. 그래서 G7 회의에서 개최국 영국 수상을 가운데 두고 한국 대통령과 미국 바이든 대통령이 자리를 잡는 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럴 정도로 이미 한국은 역량을 키워놓았다. ‘오징어 게임’이 던지는 질문에 한국이 실천하면서 답을 찾아가며 지구촌 미래를 좌우할 정도로 책임이 막중하다.

운크타드(UNCTAD) 유엔국제연합무역개발회의에서 한국은 만장일치로 선진국임을 인정받았다. 한국만이 유일하게 후진국, 개도국, 선진국의 경험을 가지고 있다. 한국이 주요 선진국으

로 기존의 선진국이 하지 못한 일을 해내기를 바라는 것도 국력만이 아니라 이런 역사의 경험 때문이다. 한국은 후진국과 선진국 사이에서 세계 무역질서를 올바르게 잡아야 한다고 CKB채널은 요약하고 있다. 중국이 일대일로에서 보여준 제국주의적 탐욕으로 세계를 중국에 속국화 하려는 도전도 한국이 중국과 미국 사이에서 조절해야 할 역할을 가지고 있다. 지금은 사드 보복처럼 한국을 마음대로 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사이 한국은 강해졌다. 고래 사이에 낀 등 터지는 새우가 아니라 둘을 조정할 수 있는 역량을 발휘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 역량을 세계에 알린 게 바로 ‘오징어 게임’ 열풍이다. 이런 열풍이 던지는 질문에 한국은 전 세계에 답해야 하고, 답할 역량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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