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유를 부려라(비즈니스 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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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유를 부려라(비즈니스 협상)
  • 김승수 기자
  • 승인 2024.03.18 07: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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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비즈니스협상론
갸우뚱하는 나를 향해 외판원은 애써 여유있는 웃음을 보이면서 재빨리 조그만 영어사전 한 권을 꺼내더니 어느새 내 손에 쥐어주고 있었다.(25p~)

미국에 공부하러 가기 전 잠시 직장 생활을 하고 있을 때 어느 여자 외판원에게 영어 회화 교재와 테이프를 엉겁결에 구입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다른 동료들보다 싼값으로, 게다가 앙증맞은 영어사전까지 받은 것을 알게 된 동료들이 내가 인상 좋고 매력적이기 때문에 싸게 산 모양이라고 추켜세웠다.

멋쩍은 표정으로 그럴리가 없다고 말하면서도 속으로는'정말 그런 게 아닐까?'하면서 은근히 기분 좋았던 것도 사실이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협상을 체계적으로 연구한 적도 없었고, 사업과는 거리가 먼 영문학 전공에 신학을 부전공한 사람이라 다른 사람보다 특별히 협상을 잘할만한 이유도 없었던 터였다.

그러나 그것은 환상에 불과했다. 그 뒤 다시는 그 여자 외판원처럼 알아서 특별히 싸게 해준다거나 특혜를 베풀어주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왜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었을까? 나를 하마터면 크게 착각하게 만들 뻔했던 그 여자 외판원과의 협상 내막을 돌이켜 보자.

점심시간이 지난 터라 약간의 나른함이 꾸물꾸물 밀려오고 있었다. 그때 "실례합니다."하는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무실에 찾아온 그 여자 외판원은 나른해하는 내 상태를 눈치챘는지 바로 내 옆자리로 다가왔다.

그러고는 제법 그럴싸하게 만들어 놓은 색색 가지의 팜플릿을 늘어놓더니 타사 제품과 비교해가며 조목조목 설명하기 시작했다.

마침 유학 준비 중이던 나는 영어 회화와 토플시험 준비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외판원이 그토록 달콤하게 유혹했던 제품에 대해서는 좋다 나쁘다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엉뚱하게 토플시험 대비용 교재나 테이프에 대해 물어보았다.

외판원은 기껏 설명한 책에 대해서는 흥미를 보이지 않고 자신이 팔지 않는 물건을 찾자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 교재와 테이프로도 토플 성적은 충분히 올릴수 있어요. 자,보세요."

"아무리 그래도 시험 준비하는 데에는 다 요령이 있는 법인데 이 교재 가지고는 좀......."

이렇게 시작된 대화가 자신에게 불리한 쪽으로 진행되자 다급해진 외판원은 새로운 제안을 했다.

"선생님,사실 서점에 가시면 토플시험용 책과 테이프는 얼마든지 사 보실 수 있습니다. 회사 규칙상 이러면 안 되지만 제가 토플책값을 빼드릴 테니 나중에 사 보시는 걸로 하시고......."

여전히 망설이고 있는 나를 향해 외판원은 어색하게 웃으며 조그만 영어사전 한 권을 재빠르게 꺼냈다.

"유학 가신다고요? 주머니 속에 넣고 다니시면서 전철 안이나 뭐 그런 데에서 짬짬이 공부하시면 좋을 것 같아요."

이렇게 해서 깎아달라고 말하지도 않고 싼값에 덤까지 얻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다른 동료들은 한 푼도 못 깎고 정가대로 구입했다고 한다.

그래서 내가 인상 좋고 매력 넘치는 남자(?)로 둔갑한 것이다.

나중에 미국 마이애미에서 있었던 협상 세미나에 참석하고서야 그때 왜 내가 더 좋은 조건으로 물건을 살 수 있었는지 이해가 되었다.

'상대방이 가격이나 조건을 제시했을 때 곧바로 응답할 필요가 없다.'라는 협상 전술이 있다.

바로 여기에 해답이 숨어 있었다. 여기서 잠시 그 세미나의 내용을 소개하겠다.

일본인 특유의 협상 전략과 그 장단점을 미국인의 시각으로 분석해가며 그들이 일본인과의 협상에서 가장 당혹스러워하는 점은 무엇인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미국인의 협상 패턴은 탁구공을 주고받듯 한쪽에서 가격 제안을 하면 곧바로 상대방이 가격을 깍거나 올리자고 반응하고 이러한 상대방의 제안에 대해 또다시 역제안을 하면서 곧바로 반응을 보인다 .

미국인들은 이런 패턴에 익숙한데 반해 일본인에게 가격 제안을 하면 대체로 한참 동안 대답을 들을 수가 없다. 일본인은 심각한 표정으로 뚱하니 앉아서 메모지에 알아보지 못할 일본어로 뭔가 끄적거리기도 하고, 계산기를 꺼내서 두들겨보기도 한다.

상대방이 제안한 내용에 대해 즉각적인 응답을 해주지 않는 것이다.그러면 먼저 가격을 제안한 미국인은 이제나저제나 기다리다가 '혹시 내가 너무 터무니없이 높게 부른 건 아닌가?'아니면 '내 물건에 흥미가 별로 없는 것 같다. 물건에 무슨 하자가 있는 건 아닌가?'하는 생각으로 슬슬 조바심을 내기 시작한다.

상대방의 느린 반응에 익숙하지 않은 미국인은 겉으로는 냉정하고 차분해 보이지만 사실상 잔뜩 겁을 먹은 채 처음에 정했던 원대한 목표가 무너져 내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다.'이런,좀 깍아줘야 할 것 같군.대체 얼마로 해줘야지?'혹은 '이를 어쩌지?뭔가 더 얹어 준다고 할까?' 참을성 없는 사람은 그 순간에 가격을 갂아주기도 한다.

어쨌든 물건을 팔긴 팔아야 하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참을성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상대방이 드디어 반응을 보이면 워낙 기다리던 끝이라 조금 무리한 제안에도 그저 고맙게 생각하며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고 한다.

처음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그 외판원은 자신의 제안에 흥미를 보이지 않고 자꾸 다른 이야기를 하는 나를 보며 이런 생각을 했을 것 같다.

'토플시험 대비용 책자라! 정말 난감하군.물건을 사게 만들려면 토플시험용 책자를 끼워 팔아야만 할 것 같은데 ..... 그런건 없고 좋다! 내 커미션에서 가격을 깍아줄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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