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레리꼴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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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레리꼴레리
  • 장익수
  • 승인 2021.03.27 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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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 시치료 센터장 박정혜

얼레리꼴레리

벽강 류창희 그림 <얼레리꼴레리>

  어릴 때 나는 그다지 산뜻하지 못 했다. 학교에서는 거의 왕따였다. ‘거의’라고 붙이는 이유는 어쩌면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실, 친하게 지냈던 친구 한 두 명쯤은 있었을 거라고 여겨진다. 그런데 이름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친구’라는 이름이 어쩐지 낯설게만 느껴진다. 그 일 때문인지도 모른다. 
  
  초등학교 일 학년 때, 우리 집은 두 번 이사를 했다. 마산 양덕동에서 대구 대명동으로. 대구에서 수 개월간 있다가 다시 마산 양덕동으로. 그러니까 양덕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또 전학을 갔다가 다시 양덕초등학교로 온 것이다. 대구에서의 생활은 몇몇 퍼즐의 조각처럼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운동회를 앞두고 운동장에서 댄스 연습을 했다.

  농부가 씨를 뿌려~로 시작하던 노랫소리에 맞춰 빙그르르 몸을 돌리곤 했다. 누군가가 자신의 집에 나를 초대했다. 그 친구 집에서 놀다가 저녁 어스름이 깔릴 무렵쯤에 나는 집으로 가야해서 나왔다. 친구가 잘 가라는 말만 하고 나를 대문 밖으로 나가게 했다. 마치 실컷 가지고 놀다 밥 먹을 때가 되어 아무렇게나 내버려두는 장난감이 된 기분이었다.

  나는 ‘잘’ 가지 못 했다. 어디가 어딘지 전혀 몰랐기 때문이었다. 숫기 없던 나는 그 말을 할 수 없었다. 친구는 자신의 집 안으로 쏘옥 들어가 버렸고, 집에서는 밥 짓는 냄새가 구수하게 나오고 있었다. 어디가 어딘지 전혀 모르는 골목 안에서 어떻게 집으로 갔을까. 그 당시를 생각하면 내 기억 속에서 떠오르는 장면은 그 순간 나는 굉장히 막막했고 울고 싶을 지경이었고, 길들은 너무나 낯설어 나는 다른 세계에 온 것 같았다는 사실이었다. 신기하게도 다시 집으로 돌아온 것은 그야말로 ‘기적’이었으리라.

  나는 어떻게 해서 ‘기적’이 일어났는지에 관해서는 기억나지 않는다. 누군가 도와주었을까? 절대로 잊지 말라고 부모님이 가르쳐주던 집 주소를 잊지 않고 있었기 때문일까. 어쩌면 그 친구가 다시 나와서 우두커니 서 있는 내 손을 잡고 친절하게 내가 잘 알 수 있는 곳까지 바래다주었을까? 그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짐작해보지만, 잘 모르겠다. 어쨌든 미아가 되지 않은 것만 해도 내게는 기적이 일어났던 것이다. 참, 이상한 일이다. 예전에는 이 기억만 떠올리면, ‘막막함’쪽에만 초점을 맞춰서 마치 친구가 나를 배신한 것 마냥 언짢을 정도의 슬픔만 치밀어 오르곤 했다. 어떻게 해서 내가 잘 돌아가게 되었는지에 관해서는 안중에도 없었다. 똑같은 상황을 두고 이제는 잘 돌아가게 된 사실에 초점을 맞춰서 나는 ‘기적’을 말하고 있다. 신비한 노릇이다. 

  대구에서 일어난 또 다른 일을 떠올리자면, 하마여인숙이 생각난다. 언니는 나보다 세 살이 많았지만, 학년으로는 두 학년 위였다. 내가 일곱 살에 초등학교에 입학했기 때문이었다. 언니도 친구를 사귀었는데, 그 친구가 하마여인숙에 살고 있었다. 우리는 자주 그 여인숙으로 찾아가서 한옥 식으로 된 집의 문기둥에 기대서서 얘기를 나누거나 뛰어 놀곤 했다. 그 언니 친구네 집이 하마여인숙을 하고 있었는지, 아니면 장기 투숙하고 있었는지는 잘 모를 일이다. 아무리 길어도 육 개월을 넘지 않았을 그 짧은 기간 동안, 우리는 누군가를 새롭게 만났고 무슨 일들을 경험했으며, 결국 작별도 하고 말았다. 그때, 학교에서 공부하던 국어책에서는 소중한 꽃씨를 간직해서 집에 가지고 온 한 소년이 꿈속에서 꽃씨 요정들과 만나고 있었다. 나는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요정 중의 한 명이 되어 춤추는 꿈을 꾸기도 했다.

  다시 마산으로 와서 대구로 가기 전, 내가 입학했던 학교에 다녔다. 그곳에서 누군가와 말을 하고, 친해질 무렵이었다. 학교를 파하고 나서였다. 각자 집에 가서 거추장스러운 가방을 놓고 나서 놀이터에서 만나자고 했다. 실컷 놀 수 있다는 부푼 기대로 나는 흔쾌히 알겠다고 했다. 쏜살같이 가방을 풀어놓고 놀이터로 나갔다. 친구는 오지 않았다. 잠시 후, 올 거라는 기대로 나는 혼자 땅파기 놀이를 하고 있었다. 아무리 땅을 파도 친구는 오지 않고 후두둑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친구가 곧 나타날 것만 같아서 그 자리를 뜰 수 없었다. 우리는 분명 약속을 했으니까, 친구는 곧 나타날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친구가 짜안! 하고 나타나면 이따위 비에 젖은 머리칼과 옷은 아무렇지도 않을 터였다. 비를 피하러 가버린 탓에 놀이터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홀로 그네 위에 앉아서 친구를 기다렸다. 비가 그쳤지만, 점점 땅거미가 몰려오고 있었다. 곧 친구가 올 거라고, 우리는 신나고 재미나게 놀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친구는 결국 오지 않았다. 

  사실, 생각해보면 별 것 아닌 일일 수 있다. 그런데 나는 오래도록 이 기억에서 자유롭지 못 했다. 아무렇지도 않게 이 기억을 떠올릴 수 없었다. 굳이 일부러 꺼낸 것은 아니었지만, 혹시라도 이 기억을 말하려고 하면, 이상하게도 자꾸 눈물이 나왔다. 나는 비오는 날, 아무도 타지 않는 빈 그네가 된 것만 같았다. 수십 년이 지나서도 여전히 그 기억은 나를 꼭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어디선가 친구가 얼레리꼴레리하며 일부러 나오지 않고 숨어서 나를 놀려먹고 있었을까?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친구는 나가려고 했는데 비가 와서, 엄마한테 붙들렸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가긴 어디가! 비 오잖아. 그냥 집에 있어. 그때는 휴대폰도 삐삐도 없던 시절이었다. 급박하게 발생한 상황을 나한테 전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왜, 이 생각을 하지 못 했을까. 그냥 오지 않은 친구, 버림받은 나, 수십 년 동안 왜 그렇게만 생각해왔던 걸까. 

  모든 약속은 지켜야하지만, 어쩔 수 없을 때가 있기도 하다. 피치 못해 지키지 못했던 약속에 관해서는 너그러울 수 있다면 나는 좀 더 자유하게 될 것이다. 이 간단한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은 그때로부터 사십 년이 흘러야 했다. 이제 다시 사십 년이 흐른다면, 그때까지 살 수 있다면, 나는 더 깊고 넓은 마음을 배울 수 있게 될까. 이제, 이 기억을 떠올리면서 나는 울지 않는다. 

박정혜  시인, 문학치유사, 간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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