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자해지(結者解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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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자해지(結者解之)
  • 홍경석 편집국장
  • 승인 2024.03.20 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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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권자가 지켜보고 있다

홍만종(洪萬宗)은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시평가(詩評家)다. 정통적인 시문보다는 오히려 역사・지리・설화・시화 등에 관심을 기울여 63세 때인 1705년에는 사서(史書) ≪동국역대총목 東國歷代總目≫을 편저하였다.

70세 되던 1712년에는 역대 시화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는 ≪시화총림≫ 전 4권을 편찬하였다. 본관은 풍산이며 자는 우해(于海), 호는 몽헌(夢軒)이다.

문과에 등제한 후 병조정랑으로 도승지에 추증된 부친 홍주세(洪柱世)와 이조판서를 지낸 정광경(鄭廣敬)의 딸로 후일 숙부인에 추증된 모친 사이에서 1남 2녀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당시 채유후(蔡裕後).이식(李植) 등으로부터 대가의 평을 들을 만큼 시명을 얻었던 부친의 훈도아래서 성장하였다. 정두경(鄭斗卿)에게 직접 시문을 사사받았던 그는 김득신(金得臣), 홍석기(洪錫箕) 등과 교유하였다.

이처럼 문한(文翰)의 가문에서 출생하여 문재가 출중했음에도 불구하고 환로(宦路)에 뜻을 두지 않고 단학(丹學)이나 문학(文學)에 관심을 기울였던 이유는 부친의 정치적 실각, 또는 자신의 신체적인 병약과 정치적인 불우에서 찾을 수 있다.

효종 2년(1651)에 발생한 김자점(金自點)의 옥사(獄事)에 연루된 부친이 외직(外職)으로 축출되었다가 현종 2년(1661) 사망하자 이에 충격을 받은 홍만종은 이듬해 어질병을 얻어 1년여를 신음하였으며, 이후에도 계속 그 병으로 인해 고생하였다.

와병 중 양생술에 관심을 갖게된 그는 도교(道敎)에 심취하였고 이때의 경험을 토대로 1666년 ≪해동이적 海東異蹟≫을 편저하였다. 병으로 두문불출하며 문우(文友)들과 시주(詩酒)를 즐기던 그는 1673년 ≪소화시평 小華詩評≫을 저술하였다.

33세 되던 숙종 원년(1675) 진사과에 급제하였지만 출사(出仕)하지 못하고 서호(西湖)에 머물며 ≪순오지 旬五志≫를 편저하였다.

1680년 부사정의 직책을 얻었으나 허견(許堅)의 역모사건에 휘말려 간원(諫院)의 탄핵을 받고 유배되었다가 1683년 정월에 풀려났다. 이러한 사정으로 벼슬길이 막히자 그는 이후 더욱 저술에 전념하였다.

정통적인 시문보다는 오히려 역사 · 지리 · 설화 · 시화 등에 관심을 기울여 63세 때인 1705년에는 사서(史書) ≪동국역대총목 東國歷代總目≫을 편저하였으며, 70세 되던 1712년에는 역대 시화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는 ≪시화총림 詩話叢林≫ 전 4권을 편찬하였다.

이 외에도 ≪시평보유≫ · ≪증보역대총목≫ · ≪동국악보≫ · ≪명엽지해≫ · ≪동국지지략≫ 등 총 10종의 편저가 있다. 영조 원년(1725) 83세의 일기로 사망하였으며, 묘소는 충남 연기군 동면 갈산리에 있다.

결자해지(結者解之)는 ‘일을 저지른 사람이 일을 해결해야 함’을 뜻한다. 이는 위에서 소개한 홍만종이 지은 문학평론집 <순오지(旬五志)>에서 유래한 말로 "맺은 자가 그것을 풀어야 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총선을 앞두고 여당이 이종섭 호주대사 출국과 황상무 시민사회수석의 설화를 조속히 해결하지 않으면 ‘진짜 위기’라고 토로했다. 국민, 아니 유권자가 지켜보고 있다. 결자해지의 빠른 결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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