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작가의 차(茶) 이야기 / 와비차의 세계를 추구하는 일본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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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작가의 차(茶) 이야기 / 와비차의 세계를 추구하는 일본차
  • 강신영
  • 승인 2023.09.12 0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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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비'란 복잡한 세상에서 단순함과 소박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일본의 문화적 경향을 의미합니다. 와비차는 이런 심상을 반영하는 차 문화입니다.
한국전통음식학술연구소 강신영 대표
한국전통음식학술연구소 강신영 대표

 

중국에서 수입된 일본차는 일본 중세 시대에 이르러 커다란 전환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15세기 후반부터 일본의 차(茶) 문화는 겉으로 보이는 사치와 호화로움보다는 내면적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성향으로 나타나는데 이른바 와비차(佗び茶)의 세계입니다. ‘와비’란 복잡하고 어지러운 세속에서 탈피해 소박한 일상에서 느끼는 심경을 일컫는 말입니다. 즉, 요란하며 사치스러운 것을 배제하고, 불필요한 것을 없애고, 간소하고 세련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인데 일본차의 세계관을 한마디로 함축하는 단어로 통하고 있습니다.

앞서 일본차의 역사에 대해 간략히 알아보았는데 이번 시간에는 일본에서 차가 발전하게 된 경위에 대해 좀 더 상세히 살펴볼까 합니다. 차는 일본이 중국의 선진 문물과 제도를 배우고 도입하려고 했던 나라(奈良)・헤이안(平安)시대에 견당사나 유학 승려들에 의해 들여온 것으로 추정됩니다. 헤이안 초기(815년)의 일본후기(日本後記)에는 '사가(嵯峨) 천황에게 큰스님 나가타다(永忠)가 오미(近)의 본샤쿠지(梵寺)에서 차를 달여 모셨다'고 기술되어 있는데 이것이 일본차에 관한 최초의 기술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차는 매우 귀해서 승려나 귀족 계급 등 극히 한정된 사람들만이 마실 수 있는 사치품이었습니다. 이 무렵의 차 제조법은 다경(茶經)에 나와 있듯이 찻잎을 찐 후에 절구에 찧어 건조한 후 굳어진 상태를 일컫는 헤이차(茶)였던 것 같습니다.

가마쿠라~남북조 시대(1192-1392)

선종(禪宗)의 일파인 일본 린사이슈(臨 宗)의 시조인 에이사이(永西, 1141-1215)는 두 차례에 걸쳐 송나라에 건너가 선종을 공부했는데 당시 그는 선원(禪院)에서 음차가 성행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귀국 후 에이사이는 일본 최초의 차 전문서인 끽다양생기(喫茶養生記)를 저술하여 차의 효능에 대해 설파하고 다녔습니다. 1214년 에이사이는 술을 즐겨 마시는 쇼군 미나모토 사네토모(源 実朝)에게 좋은 약이라면서 차를 곁들여 이 책을 바쳤다고 문헌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끽다양생기는 제다법에 대해서도 기술되어 있는데, 이는 송대에 만들어진 텐차(碾茶)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에는 텐차를 으깨어서 뜨거운 물을 붓고 차선으로 거품을 내어 마시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화엄종 승려인 묘우에 쇼닌(明恵 上人, 1173-1232)은 교토 토가오(栂尾)의 코우잔지(高山寺)에 차를 심고 음차를 장려했습니다. 이곳이 가장 오래된 다원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토가오에서 재배된 차를 혼차(本茶)라고 하여 다른 차와 구별하였습니다. 가마쿠라 말기부터 남북조에 걸쳐 사원을 중심으로 발전한 다원은 교토에서 더욱 확산되어 이세(伊勢), 스루가(駿河), 무사시(武) 등에서도 재배되게 되었습니다. 가마쿠라 시대에는 선종사원에 음차가 확산됨과 동시에 사교의 도구로서 무사 계급에도 음차가 점차 퍼져나갔습니다. 남북조 시대에 이르러서는 차를 마시고 비교하여 산지를 맞추는 토우차(闘茶)가 열렸습니다.

무로마치~아즈치모모야마 시대(1336-1603)

무로마치시대의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足利 義満, 1358-1408)는 교토에서 생산되는 우지차(宇治茶)를 유난히 좋아했는데 이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 秀吉 1537-1598)에게도 이어져 우지차 브랜드가 형성되어 갔습니다.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는 우지에서 햇볕을 차단하여 새싹을 생육시키는 복하재배(覆下栽培)도 시작되어 고급 맷돌 차로 가공되었습니다.

15세기 후반 무라타 쥬코(村田 珠光 1423~1502)는 다도(茶道)에서 다구(茶具)나 예법보다는 화경청적(和敬淸寂)의 경지를 중시하는 와비차(侘茶)를 고안해 내었습니다. 이것을 계승한 타케노 죠오(武野 紹, 1502~1555)와 센 리큐(千 利休 1522~1591)등에 의해서 차노유(茶の湯)가 완성되어 부호 상인들과 무사들에게 확산되어 갔습니다.

에도시대(1603-1868)

차노유는 에도막부의 의례에 정식으로 도입되어 무가(武家) 사회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한편 에도시대에는 일반 서민들에게도 음료로서 차가 퍼지고 있었음을 당시 기록에서 알 수 있습니다. 서민들이 마시던 차는 말차(抹茶)가 아니라 간단한 제조법으로 가공한 찻잎을 달인 것이었던 것 같습니다. 1738년, 우지타하라고(宇治田)의 나가타니 소엔(永谷 宗円)은 제차 방법을 바꾸어 센차(煎茶)의 제법을 고안해내어 센차의 시조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이전까지 볼 수 없었던 영롱한 초록빛 색깔과 단맛, 그윽한 향기는 에도 시민들을 경탄하게 했습니다. 나가타니 소엔이 만들어 낸 제법은 우지 제법(宇治製法)이라고 불리며 18세기 후반 이후 전국의 다원으로 확산되어 일본차의 주류가 되어 갔습니다. 또한 보다 고급스러운 센차를 개발하기 위해 맷돌에 사용되던 복하재배를 센차에 응용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져 1835년 야마모토 가베에(山本 兵)에 의해 교쿠로(玉露) 제조법이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1858년 에도막부는 미국과  수호통상조약을 맺고 1859년 나가사키(長崎), 요코하마(横浜), 하코다테(函館)의 개항을 계기로 당시 최대수출품인 생사(生糸)에 버금가는 중요한 수출품으로 차 181톤이 수출되었습니다.

메이지시대~쇼와시대 초기(1868-)

메이지 유신 이후에도 차 수출량은 정부의 지원에 힘입어 미국을 중심으로 증가해 메이지 20년(1887년)까지 수출 총액의 15~20%를 차지할 정도였습니다.  메이지 초기, 신정부 세력의 탄압을 받아온 사족(士族) 출신 인물들의 사업진출 등을 계기로 평탄한 대지에 집단 다원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초기에 다원을 개척한 사족들은 점차 떨어져 나가고 대신 농민들이 다원을 계승해 나가게 되었는데 이는 차 수출 가격 하락과 다원 조성에 막대한 비용이 든 것이 주된 원인이었습니다. 집단 다원의 등장은 다원의 형성에만 그치지 않고 유통의 발전을 가져왔고 다상(茶商), 중개인, 차 도매상 출현, 각종 기계의 발명 등 차 산업 생태계의 정립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대표적으로 찻잎모엽기(茶葉揉葉機)의 발명을 시작으로 메이지시기에는, 차 제조의 기계화가 급속히 진행되어, 에너지 절약과 더불어 품질 안정화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메이지 중기까지 주력 수출품 역할을 해온 일본차는 인도,실론 홍차의 대두로 수출은 점차 정체되었으나 대신 국내 소비가 늘어나면서 차는 점차 국내용 기호 음료로 변해갔습니다. 차가 일본인의 생활에 뿌리내린 것은 다이쇼 말기부터 쇼와 초기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약간 의아스러울 것입니다.

한국전통음식학술연구소 대표 강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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