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쟤가 S대에 합격한 애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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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쟤가 S대에 합격한 애라며?”
  • 홍경석 시민기자
  • 승인 2022.06.29 0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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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갈피 마다에는 나의 눈물이
그동안 4권의 저서를 냈다. 5번 째 저서를 집필 중이다.
그동안 4권의 저서를 냈다. 5번 째 저서를 집필 중이다.

 

#1

 

눈물은 눈알 바깥면의 위에 있는 눈물샘에서 나오는 분비물이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지만 늘 조금씩 나와서 눈을 축이거나 이물질을 씻어 내는 데 도움을 준다. 자극이나 감동을 받으면 더 많이 나온다.

 

그런데 눈물은 대략 아픔이나 감격할 경우에 더 많이 분출된다. 처음으로 눈물과 만난 것은 초등학생 때였다. 급우와 또래들은 다 있는 엄마가 나에겐 없었다. “엄마 없는 아이”라는 꼬리표와 주홍글씨가 각인되었다.

 

지금은 어버이날이지만 당시엔 5월 8일이 어머니날이었다. 이날이 되면 급우들의 어머니들이 고운 옷으로 치장하곤 교실까지 점유했다. 하지만 나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는 날이었다. 요란스럽게 어머니날 행사가 치러지는 교실을 슬그머니 빠져나왔다. 학교 뒷동산에 올라 하늘을 올려다봤다.

 

구름도 엄마가 앞장서고 아이들 구름이 우르르 몰려가는 모양새였다. 그렇지만 나에겐 해당하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2

 

딸이 고등학생이 되었다. 돈이 없었기에 사교육을 시켜줄 수 없었다. 미안한 마음에 고교 재학 3년 동안 아침 등굣길엔 동반자로, 저녁 하굣길엔 정류장으로 마중을 나갔다. “오늘은 뭘 배웠니?”, “아빠가 맛난 떡볶이 만들어줄까?”

 

무엇이라도 끄집어내어 대화를 이어 나갔다. 닫혔던 딸의 마음 대화창이 시나브로 활짝 열렸다. 그해 겨울, 두 군데 명문대학에서 딸에게 합격증이 도착했다. 학원 한 번 가지 않았음에도 하늘의 별 따기만큼이나 어렵다는 명문대 합격이라니!

 

감격하여 눈물이 쏟아졌다. 학교에선 더 난리가 났다. 의대를 가겠다는 딸의 고집을 막아달라는 선생님들의 방문과 회유가 이어졌다. 결국 가까스로 방향을 돌려 딸은 S대로 직항했다. 이어 고교 졸업식 날이 도래했다.

 

그날 학교서 시상한 이런저런 상의 절반을 딸이 독식했다. 졸업식장이 술렁거렸다. “쟤가 이 학교에서 유일하게 S대에 합격한 애라며?”, “저 아이 부모는 얼마나 기분이 좋을까!” 그랬다. 나는 그날도 너무 행복해서 눈물을 흘렸다.

 

#3

 

어제는 숙부님의 49재(四十九齋)였다. 식전부터 일어나 바지런을 떨었다. KTX를 타고 천안아산역까지 간 뒤 지하철로 환승하여 온양온천역에 내렸다. 거기서 다시 택시로 00 병원 장례식장으로 달렸다. 49일 전 숙부님의 장례를 치른 곳이다.

 

이윽고 도착한 사촌 동생들과 엄숙하게 49재를 올렸다. 내 차례가 되어 술잔을 올리자니 또 그렇게 눈물이 났다. 숙부님은 엄마가 없었던 나를 어려서부터 업어 키워주신 분이다. 성격 차이로 가출한 아내에게 분개하고 낙망한 아버지는 허구한 날 분노의 술만 드셨다.

 

가장의 책무를 방기했고, 공부 잘했던 이 아들마저 중학교조차 보내지 않았다. 두 번이나 중학교 입학금을 숙부님이 보내주셨지만, 그마저 술과 바꿔 마셔서 탕진했다. 하는 수 없어 중학교 대신 역전에서 소년가장으로 고생을 감수해야 했다. 훗날 숙부님의 사업이 번창하여 숙부님 사업장의 책임자로 일했다.

 

나의 잡을손(일을 다잡아 해내는 솜씨)이 훌륭하여 매출은 더욱 신장하였으며 관공서의 표창도 잇따랐다. 흡족해진 숙부님께서는 나를 술집까지 데리고 가셨다. 그리곤 만취하시면 “네가 남들처럼 대학까지 졸업했더라면 큰 인물이 되고도 남았으련만...”이라며 눈물을 흘리셨다.

 

#4

 

중학교를 못 간 설움은 만 권의 독서로 충당했다. 오십 나이에 입학한 사이버대학에서의 공부는 4권의 저서 발행이라는 선과(善果)로 나타났다. 그 4권의 책갈피 마다에는 나의 통한과 눈물이 차곡차곡 담겨있다.

 

나는 비록 어쩔 수 없이 눈물의 포로 인생이었다지만 아이들에게만큼은 절대로(!) 그런 아픔의 눈물을 유산으로 물려주면 안 되었다. 오늘날 두 아이는 견실한 직장과 안온한 가정에서 나의 분신인 손녀 손자와 함께 아주 행복하다.

 

이제 내 나이도 어느덧 ‘6학년 4반’이다. 나 또한 언제 이승을 떠날지 모른다. 언젠가는 저세상에서 어머니도 만날 것이다. 그럼 내가 어머니에게서 꼭 듣고픈 말이 하나 있다. 그건 바로 “정말 미안했다! 나의 불찰로 말미암아 핏덩이였던 너를 버리고 집을 나왔던 이 엄마를 용서해다오.”이다.

 

진정한 눈물은 사람을 무력화시킨다. 엄마의 진솔한 눈물을 보는 순간, 나는 수십 년 동안 쌓였던 분노와 아픔의 상처까지 씻은 듯 치유될 수 있을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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