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언론 대학생 기자
역사문화탐방
남양주시 마석 모란공원
210418 역사문화탐방이야기(37) - 권력으로부터의 자유
고려신문 김창호 대표가 끊임없이 언론탄압에 맞서 살아온 이형관 군산대 학생기자에 대한 인식을 시켜준 덕에 제일 먼저 찾은 곳이었다.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고민스러울 때 서슴없이 그 길로 가게 만들었던 사람들이 있었기에 나는 오늘도 그분들의 숭고한 희생때문에 가야 할 길을 가고 있다.
지난 2018년 그를 만나고 왔었다. 당시 공교롭게도 노회찬 전 정의당 의원이 모란공원에 안장되었던 시기였다.
고 노회찬 의원
진보정치인으로서 생을 안타깝게 마감한 그가 이곳으로 향했던 그날 나는 민주주의와 이땅의 불평등을 타파하기 위해 투쟁했던 동지 한 사람이 사라졌다는 슬픔에 가슴 한켠이 시렸었다. 내가 생각하는 진정한 정치인은 노무현 전대통령과 같이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꿈꾸는 사람이다. 주위를 돌아보면 그런 정치인이 많이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살고 있는 지역도 그렇다. 다 자신들의 아성 쌓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내가 잘못 판단하는 것일까?
정치 권력에 맞선다는 것은 매를 스스로 자처하는 일과 같다. 계란으로 바위치기와 같다. 왜냐하면 사람에 대한 영향력, 홍보로 인한 영향력, 그리고 제일 중요한 돈에 대한 영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역사가 그런 권력 앞에 순응하지 않는 것이 최선의 길이었는지는 스스로 물어보곤 한다.
가장 중요한 요소는 자신과의 싸움이라 생각한다.
뒤돌아 보지 않는 삶
나를 지지해 주지 않고 사람들이 편견을 뒤집어 씌울까 원망하며 한 해를 보냈던 지난 날의 과오를 깨닫고 도산서원에 다녀왔다. 그 이후로 후학양성에 관심을 쏟고 있다. 후학...가장 중요한 것은 어떻게 지속적인 교육생을 만들어 낼까 였는데 내가 선택한 것은 커피교육이다. 그리고 음악을 통한 치유의 길을 모색하기 위해 시낭송시노래 힐링음악회를 기획해 운영하고 있다. 그 일을 추진하며 관으로부터 재정 지원을 꺼렸던 이유는 자생력을 잃어버리거나 매너리즘에 빠질 염려때문이다.
벼랑 끝에 서야 살 길을 찾는다.
탄탄대로에 서 있으면 풍요롭지만 모험을 꺼린다. 안정적인 내일을 위해 돈도 비축하고, 실력도 쌓고, 내 주머니가 불룩해질 때까지 욕심 많은 사람으로 생의 마지막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많다. 개인적으로 아쉬움이 크다.
오늘 하루가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살아가겠다 결심 한 것은 도산서원에다녀와서였다. 퇴계 이황선생이 키운 후학들(영남학파)이 조선의 정치,경제,문화 등의 모든 분야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사실은 내게는 신선한 충격이었었다.
개인적으로 마석(화도읍)에서 7년 그리고 그 이후 호평동으로 이사해 남양주에 거주하며 우리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탐방하고 느껴졌던 것은 문화벨트 공간조성과 노력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유네스코 4대인물인 정약용 선생을 국제적으로 더욱 키워내지 못하는 것과
황제 고종,순종이 잠들어 있는 조선 유일의 황제릉인 홍유릉
흥선대원군
세조,
정순왕후,
광해군 등의 왕릉
청록파시인의 대가 조지훈
변안렬 장군(진건읍, 원주 변씨 시조, 공민왕과 노국공주를 호위하며 국내 이주)
그외 전통가옥
그리고 아름다운 자연 유산이 남양주 곳곳에 숨겨져 있지만, 정작 이 문화적 유산을 잘 마케팅하여 문화도시 남양주로 만드는 것에는 소홀한 것 같은 남양주의 문화정책에 늘 비판적 입장이다.
특별히 오늘 그 시대의 부조리를 고발했던 이형관 기자 앞에 또 다시 서 있다.
이형관
1973년 경기도 성남 출생
1992년 인천 제물포고 졸업, 군산대 수학과 입학
1994년 군산대신문 편집장,
14대 전국대학신문기자연합(전대기련) 전북지부장
1995년 - 96년 전대기련 전북지부 집행부, 하이텔 전대기련 동호회 시삽
1996년 - 97년 전대기련 중앙집행위원
1997년 9월 21일 대학언론 탄압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원광대로 가던 도중 쓰러져 19일간 혼수상태였다가 뇌출혈로 운명
군산대 신문사에서 대학언론운동을 펼치던 이형관 동지는 아무도 동지가 크게 화내는 일을 본 적이 없고 쉽게 흥분하는 것을 본 적이 없는 고요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가진 동지였다고 한다.
그러던 동지는 94년 체계조차 잡혀있지 않는 전대기련 전북지부지부장을 맡아 서두르지 않고 차근차근 전북지구를 일궜다.
나아가 96년부터는 전대기련 중앙집행위 활동을 하면서 대학언론의 올바른 방향을 잡고, 학교측에서 자행하는 대학언론탄압을 막아내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던 97년 9월 1일 밤 11시부터 새벽 5시까지 한양대에서 기자들과 간담회를 마치고, 9월 2일 오후 1시부터 새벽 5시까지 외대에서 중앙위원회회의를 준비했다. 그리고 그 다음날인 9월 3일 피곤한 몸을 이끌고 대학언론탄압문제로 힘들어하고 있는 원광대 후배들을 만나기 위해 긴급히 내려가게 되었다.
당시 동지에게 출발 직전 손이 떨리고 말이 더듬거리는 뇌졸중 초기 증세가 나타났으나 피곤해서 그럴 것이라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강남터미널로 출발했다. 그러나 동지는 새벽 7시 강남터미널 경부선 승차장 쪽 보도블럭 위에 쓰러지고 말았다. 이렇게 쓰러진 지 19일간 의식불명 상태였던 동지는 9월 21일 새벽 1시 20분 경에 운명하고 말았다.
출처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그렇게 언론탄압에 맞서 삶을 살아내려 애쓰던 한 기자의 삶과 기록을 또 다시 보고 있다.
그의 묘비명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선배답게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머리나 입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아름다운 낙조를 볼 수 있는 것은 끊임없이 떠오르는 일출이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 25세였던 그가 품었던 세상을 향한 고민
그리고 머리나 입이 아닌 몸으로 삶을 살아내려 한 젊은 생각들이 지금 이렇게 가슴속을 울리는 메아리로 다가온다.
그렇다.
민주주의를 위해
이 땅의 평화를 위해
그리고 자신보다 타인을 위해 살아갔던 수 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쌓여왔기에 그나마 세상은 지금과 같은 평화와 인권이 보장되어 온 것이다. 그런 역사가 살아 숨쉬는 모란공원은 민주주의가 살아 숨 쉬는 교육의 현장이다.
그 묘역길을 거닐고 이형관 기자의 묘비명을 읽고 그가 남긴 유품, 그리고 그의 꿈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접어 놓은 학이 선명하게 다가온다.
오늘이라는 시간
내일이라는 시간
그리고 과거의 어느 날
그 모든 것들이 부질 없이 느껴지는 날이 다시 찾아왔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두 명의 노짱...가슴속 깊은 곳에 새겨 놓은 그들이 못다 이룬 삶을 살아내기 위해 오늘도 뜨거운 햇볕을 벗 삼아 그 길을 조용히 또 한 번 걸어본다.
퇴계 이황선생은 안동의 도산서원을 택했다.
나는 어느곳을 택해야 할까?
끊임없이 중앙관직을 제안 받으며 정승까지 지냈지만 늘 그는 병을 핑계로 낙향을 반복했다. 그리고 도산서원에서 제자들을 키우며 생을 마감했다. 남양주교복은행 그리고 화도사랑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며 후회하며 외쳤던 과거의 나는 지금 사라지고 없다. 무엇보다 당시 그런 대우를 받으며 눈물흘리던 나는 도산서원에 다녀오면서 180 마음을 달리하게 되었다.
후학을 키우는 일,
그리고 권력에 순응하지 않는 일
그렇다고 재력과 사람들의 평가에 휘둘리는 일을 포기한 지 오래다.
그래서 가져야겠다.
언론권력
그 시작은 N뉴스통신으로 시작한다.
내가 꿈꾸는 세상,
내가 꿈꾸는 남양주
내가 꿈꾸는 경기도
그리고 내가 꿈꾸는 대한민국
누구나 꿈꾸지만 같이 꿈꾸며 그 날을 만들어 가는 일에 오늘 하루도 노력하려 한다.
내일을 기다리지 않는 삶
그리고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살아가려는 삶
그것이 내가 가지고 있는 내 생의 마지막 미션이다.
필자 소개
장익수 ( jangiksu@gmail.com )
N뉴스통신 편집본부장 및 편집국장
시민문화예술협회(전 시민문화촌) 상임대표
1004나눔바리스타 교수
1004클럽나눔공동체 경기동부 본부장
전 유네스코아시아태평양국제이해교육원 멀티미디어센터 운영
전 통일교육문화원 사무국장